12/01/2020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어느‘개 같은 날의 오후’

라스베가스ㅡ인디언들의 말로 초원 또는 오아시스를 뜻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밝은 대낮, 고층 호텔 방에서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그 이미지하고는 전혀 달랐다. 밤새 손님을 받고 늦잠에서 막 깨어나 게으른 기지개를 켜는, 화장기 없는 늙은 창녀의 모습처럼 천박해 보인다. 밤새 요란을 떨며 온 도시를 흥분케 했던 그 화려한 유혹의 불빛은 오간 데 없다. 바깥은 흡사 고흐가 죽기 삼 년 전 그렸다는 그림 속의 태양을 다시 불러온 듯 지글지글 거리를 달구고 있다.

그는 창문에 기대서서 하릴없이 거리의 풍경에 눈을 주다가 손목시계를 들어 날짜 판을 들여다본다. 이곳에 출장 온 지도 벌써 사흘 째… 지금 그에게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자고 먹는 시간이 온통 뒤죽박죽인 채, 이 호텔에 스스로 갇힌 포로였다. 침대에 벌렁 자빠지자 어깨위로 피곤이 무지근하게 내려앉는다. 잠이 눈까풀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지만, 암흑 세계에 갇힌 듯 정신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흐릿한 동공 속엔 카드가 연신 날아다니고 있다. 부드럽게 던져지는 카드 한 장 한 장에 서너 명 사냥꾼들의 시선이 숨 가쁘게 꽂히며, 순간 머릿속으로 숫자들이 튀기 시작한다. 어젯밤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딜러의 가슴에 ‘그레이스 홍’이라고 쓰인 영문 이름 패가 달려있다. 그녀의 손끝에서 던져진 스페이드 4의 카드 한 장이 테이블 한 쪽에서 낭패의 빛으로 파르르 떨고 있다. 히든 카드와 합치면 일곱에 넷…열 하나다 그는 자기 앞에 흩어져 있는 백 달러짜리 검은 칩을 언뜻 헤아려 본다. 몇 시간 만에 절반 이상이나 줄어든 것 같다. 호두 알 주무르듯이 손안에서 비벼대던 검은 칩 다섯 개를 다시 동그란 원 안에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그의 아미 간에 짧은 선 하나가 구겨짐을 스스로 느낀다. 여러 명의 팽팽한 시선이 딜러의 손끝에 꽂혀있다. 충열된 눈동자들이 온통 붉은 매니큐어에 뼈마디가 보이는 그녀의 손가락에 집중해 있다. 재빠르게 옆 사람들의 카드를 읽어 본다. 그림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섯 개의 검은 칩을 더 밀어 넣는다. 제발 그림 한 장만…그의 빅딜에 지나가던 구경꾼까지 어깨너머로 시선을 꽂는다.

굿 럭… 딜러가 웃음을 흘리며 카드 한 장을 그 앞에 던진다. 아, 순간 짧은 탄식이 가슴속을 훑고 흩어진다. 에이스였다. 하필, 이때에… 찬바람 한 줄기가 등을 훑고 지나간다. 이제 그에게 남은 희망이란, 딜러가 받은 카드 두 장의 합한 끝수가 열여섯… 딜러가 여섯 수 이상을 받게 되면 그녀는 스물 하나를 넘기며 자멸하게 되고, 그는 열둘이란 적은 숫자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 웃음기 걷힌 딜러의 눈 속 조리개가 미세하게 확대된걸 아는 사람은 없다.

사막 바람에 거칠어진 딜러의 팔뚝에 푸른 힘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그녀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살갗 속을 뚫고 왔을까. 푸른색, 갈색, 연 초록 색의 눈동자들이 그녀의 팔뚝에 솟은 푸른 색 힘줄을 타고 테이블 위를 구르고 있다. 그것은 영혼 없는 유리구슬이 되어 사방으로 튕기고 있다. 자기들이 살기 위해 저 카드를 들고 있는 여자가 죽어주기를 모두 공범 같은 심정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다.

던져진 카드는 하트 5… 딜러의 팔뚝에 불뚝 올라와 있던 푸른색의 힘줄이 슬그머니 잠수해 버리고, 그녀의 얼굴엔 예의 그 상투적 웃음이 다시 입혀져 있다. 졌다! 속으로 쓴맛을 느끼며 그는 나머지 칩들을 주머니에 쓸어 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뱃가죽이 등 쪽으로 당겨지며 그는 문득 시장 끼를 느낀다. 아침부터 먹은 것이라고는 카지노에서 마신 맥주 몇 병이 전부이다.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도박에 몰입한 그에겐 길게 늘어서서 기다려야만 하는 뷔페식당도, 먹을 것을 찾아 택시를 타고 이 호텔을 빠져나가는 일도 번거롭게만 생각되었다. 호흡하는 것마저도 힘들게 느껴지며 몸을 뒤채며 깊숙이 가라앉는다. 그는 잠깐 동안 내가 영영 가라앉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카드 판의 로열스티플(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이나 섯다판의 삼팔 광 땡이나 그 수(數)를 합쳐보면 모두가 한 끗이다. 동양화 판이건 서양화 판이건 즉 따라지 끗발이 최고의 그림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놈들을 거머잡으려다 인생 망친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동 .서 양을 막론하고 누가 정했는지는 몰라도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레이스 홍이 눈으로 말했다. 같은 노랑 종족이라서였을까. 순식간에 수천 불을 날린 그가 그나마 딱해 보였을 것이다.

ㅡ따라지 좇다가 인생 따라지 된 사람 수두룩해요!
참 옳은 얘기인데… 왜 진즉 그 말을 못 새겨들었을까? 따라지 한 끗발로 무소불위로 팔자 한 번 고치려다 망한 사람, 그야말로 따라지 좇다 결국엔 따라지 신세로 떨어진 ‘꾼’들이 장마당 주변에서 항시로 기웃대고 있는 거 다 알면서도 ‘딱 한판만 더‘ 중얼거리며 ‘인생역전 한방’을 꿈꾸는 인생들. 그게 바로 나였는데도…모르고 있었는가. 턱도 없이 ‘끗발 따라지’를 구하다가 그야말로 몇 달 장사 밑천 순식간에 말아먹고 진짜 따라지 되어버린 어느 ‘개 같은 날의 오후’였다. 영화 제목이 따로 없었다. **

손용상
▶ 소설가 / 경남 밀양 출생. / 경동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98년 도미.
▶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1973), 한국문화예술신인상, 에세이문학신인상, 한국평론가협회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시부문), 해외한국소설문학상 등 수상.
▶‘그대속의 타인’‘따라지의 꿈’ ‘코메리칸의 뒤안길’ ‘토무(土舞) 등 장·단편 소설집과 에세이 칼럼집(우리가 사는 이유) 및 운문집(天痴,시간을 잃은) 등 20여권 출간.
▶ 현 미국 텍사스 달라스 거주
글로벌 한미 종합문예지‘한솔문학’대표
▶ 이메일: ysson06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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