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2020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유언장에 얽힌 사연들, 악티움해전 후 제국으로

<유럽사11>

카이사르는 그렇게 죽고 그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이 때 가장 크게 실망하고 가장 심하게 좌절한 사람은 안토니우스. 그는 갈리아 전에서 카이사르의 참모로 충성했고 루비콘강을 건넌 후에는 그의 오른팔이 되어 군대, 재정, 원로원을 장악한 실세였다. 하여 자신이 당연히 후계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막상 유언장을 열어보니, <…나의 후계자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트리누스. 그를 나의 양자로 삼노라…> 아 참, 실망한 사람이 또 있기는 하다. 클레오파트라 7세. 7년 전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카이사리온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언장에는 자기 이름이나 아들 이름은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충신과 내연녀. 누구의 배신감이 더 컷을까?
옥타비아누스(BC63- AD14)는 카이사르 누이의 외손자로 당시 19세. 카이사르가 암살 당할 때 그는 로마가 아닌, 지금의 알바니아인 아폴로니아에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복수를 염려, 친지들이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로마로 직행한다. 자신의 야심은 일단 감추고, 정치 감각도 익히고 능력도 키울 시간도 벌 겸,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게 삼두정치 체제를 제안한다.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내고 자신은 폼페이우스의 조카딸과 결혼, 폼페이우스파의 막강한 해군력을 손에 넣는다. 타고난 지략가.

그리고 BC 40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암살에 가담한 300명의 원로원을 포함, 대략 2천명을 숙청한다. 여기에는 키케로도 포함된다. 그는 자신의 로마행을 돕기는 했지만 카이사르 때부터 폼페이우스 측에 줄을 댄 정적이었기 때문인 듯. 또한 수십년을 카이사르와 함께 전쟁터를 누빈 로마 정예군단에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원로원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채우고 군사력도 장악하면서 카이사르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카이사르를 신격화함으로써 자신은 ‘신의 아들’로 둔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서서히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도 될 만큼 힘을 키운 것.

우선 3두 중에 가장 허약한 레피두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간단히 제거한 후 안토니우스 입에 달달한 사탕을 물려준다. 자기는 로마와 서방을 맡을 테니, 너 님은 이집트와 동방을 맡으라는 제안. 돈과 미인을 미끼로 던져준 셈. 그러잖아도 클레오파트라가 궁금했던 안토니우스, 덥석 물었다. 그리고 그 길로 클레오파트라에게 달려가 흠뻑 빠진다. 본부인과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3명을 낳을 정도로 흠뻑. 아, 그리고 안토니우스 자신도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부인과 이혼하고 부하의 아내이자 만삭인 드루실라에게 첫 눈에 반해 결혼한다. 나. 쁜. norm. 들.

사적으로는 본처를 버림으로써 옥타비아누스와 얽힌 관계를 청산한 안토니우스는 공적으로도 로마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에게 로마 군단이 점령한 동방 영지를 상속하려 한 것. 로마 시민들은 격분하고 원로원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을 기세.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는 신전에 모셔 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해 버린다. “… 내가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속주들은 나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들에게 물려준다. … 나와 클레오파트라의 묘는 알렉산드리아 신전으로 정했다….” 죽어서도 로마를 버리겠다는 미친 결심.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사실은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아니, 꼭 섬멸하는 것이 로마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안토니우스는 그보다 전쟁 경험이 짧은 옥타비아누스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명장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있다는 것을 왜 잊었는지. 암튼 악티움 해전에서 참패, 조국의 명예와 자신의 영혼까지 내다판 세기의 미친 사랑은 자살로 마무리되고 아이들도 다 제거된다. 이로써 100여년을 끌던 로마의 내전도 완전 종식되어 앞으로는 지중해의 미풍이 살랑이는 요트 위에서 와인을 즐길 일만 남았다.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켰을 때와는 달리 자신이 싸워 이긴 악티움 해전 후에는 관용책을 폈다. 안토니우스 편에 섰던 귀족, 속주 총독, 로마로 귀환된 군인들을 모두 품었다. 이 은총을 입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유대를 통치했던 헤롯이다. 안토니우스를 열심히 지지했던 그가 이번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용서해 주고 그의 통치 영역을 요르단까지 넓혀 주었다. 이 헤롯이 아기 예수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2세 이하의 영아를 모두 죽인 바로 그 헤롯 (마태복음2:16-18).
BC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Augustus) 라는 칭호를 주면서 행정, 군대, 종교의 통치권을 일임했다. 황제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제1시민이란 뜻의 프린켑스(princeps)라 칭했다. 그러면서 군인 연금제를 도입, 군대의 충성심을 확보했고. 소방청과 경찰청을 설치, 치안에 힘썼다. 무력 보다는 외교로 국경을 지킴으로써 팍스 로마나를 일궈낸다. 아, 또 한가지, 정확한 인두세를 거두기 위해 모든 시민에게 고향에 가서 등록하게 했다(누가복음 2:1). 그래서 나사렛에 있던 만삭의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예수를 출산, 구약의 중요한 예언 한절이 성취된다 (미가 5:2).
이 모든 일을 마친 아우구스투스는 AD 14년에 사망한다. 원로원과 민회는 그를 신으로 선포하고 이후의 모든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그는 비록 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었지만 평소에 통치권은 대물림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통치권을 물려 받았듯이. 그래서 그의 유언장에는 드루실라가 데리고 온 아들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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