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2020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과 극심한 기독교 탄압

<유럽사19>

역사학자들에 의해 위기의 3세기로 불려지던 로마 군인황제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285-305)의 출현으로 종식되었다. 그의 출신성분은 별볼일 없었지만 직업 군인이 되어 황제의 경호관이 되면서 출세의 길이 트였다. 황제가 죽자, 황제 휘하의 군단에서 그를 황제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책없이 덩치만 크게 키운 로마를 떠맡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되자마자 그 큰 덩치를 감당할 절묘한 대책을 마련한다. 그 대책이란 로마를 넷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 체제 (Tetrarchy). 우선 로마를 동서로 나누고 이를 다시 둘씩 나누어 각기 다스리게 했다.
동방의 두 지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과 사위 갈레리우스를 부황제로 삼아 다스렸다. 서방의 두 지역은 막시미아누스를 황제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부황제로 임명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부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데오도라와 정략결혼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더 이상 딴 맘 먹지 못하게 콘스탄티우스와 헬레나 사이에서 난 아들 콘스탄틴을 인질로 데려와 자기 밑에서 보고 배우게 했다.
이러한 조치로 황제 자리다툼에 군인이 개입하는 병폐를 막을 수 있었고, 내란이나 외세의 침략을 제때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어 체제가 구축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은 어디까지나 국방에 한한 것. 그 외의 내정, 외교 등 모든 권한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혼란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명이 다스리지만 자세히 따져 보면 1+3의 원리, 한명의 황제가 3명의 조력자를 둔 셈.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거대한 로마제국에 튼튼한 보호막을 둘러침으로써 참으로 오랜만에 로마의 평화를 다시 누리게 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총인구 중 10%는 예외였다. 이들은 단지 기독교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평화 대신 죽음을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를 탄압한 10황제 중에서도 제일 강도 높게 탄압한 박해자였다.
그 동안 기독교는 황제의 기분에 따라 간헐적으로 가해지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진실된 교리를 꾸준히 전파, 4세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인과 공주를 포함, 궁중에도 많은 신도들이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황궁 옆에 교회가 세워 질 정도로 관대, 아니 관대라기 보다는 무관심이겠지. 그러나 사위이자 심복인 칼레리우스가 부황제가 되면서 황제를 부추겨 핍박하기 시작된다. 칼레리우스는 이방신을 섬기는 여사제인 어머니의 부추김을 받았고.
결국 황제는 303년에 기독교 탄압 칙령을 발표하고, 잔악한 핍박을 시작했다. 로마제국 안에 있는 모든 경전과 문서를 압수하고 예배 모임을 금지시켰다. 반발하는 신자들은 공직을 박탈한 후 범죄자로 처벌했다. 로마 신전에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검거, 맹수의 먹이로 던졌다. 이듬해 선포된 네 번 째 칙령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희생되었는지 포식한 맹수들이 눈앞에 던져진 먹잇감을 보고도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정도. 동물들은 사람과 달리 먹거리를 쟁여놓지 않는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종종 나무에 묶인 반라의 백인 남자가 온몸에 화살을 맞고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성 세바스찬의 순교 장면을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근위대 장교로 일하면서 감옥에 갇힌 교인들을 몰래 도와주던 기독교인이었다. 로마판 쉰들러. 그러나 그의 비밀스런 행동은 밀고되고 그가 기독교인인 것이 드러나자 화가 난 황제는 그를 내치고 궁수들을 동원, 화살형을 내린다.
그러나 궁수들 중에도 신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천사가 도왔는지, 그 많은 화살은 급소를 살짝살짝 피해 꽂혔다. 그래서 기적같이 회복된 세바스찬. 기회를 엿보다 어느날 황제의 행차를 막아섰다. 그리고는 외쳤다. 박해를 멈추라고. 죽은 줄 알았던 황제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때려 죽이라고. 이렇게 순교한 세바스찬은 로마 근교의 한 카타콤에 안치되었다. 지금은 로마 여행 중의 한 코스가 되기도.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설득, 동반 은퇴를 한다. 덕분에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 승격, 18세 때 인질로 잡혀가 12년간 생이별해 온 아들 콘스탄틴을 데려왔다. 그리고 이듬해 믿음직한 장군으로 성장한 아들을 데리고 출정, 전장에서 전사한다. 황제이자 총사령관을 잃은 병사들은 그의 부음이 다른 각료들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콘스탄틴을 부제도 아닌 황제로 옹립해 버린다.
뒤늦게 서방에서 일어난 이변을 전해 들은 동방의 갈레리우스 황제. 콘스탄틴에게 한가지 타협안을 내놓는다. 그러지 말고 서방의 황제자리는 부황제였던 세베루스에게 넘기고 당신은 부황제가 되라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되기 전인 306년 7월에 서방의 부황제로 정식 등극한다.
이런 일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며 속을 끓이는 자가 있었다. 막시미아누스가 동반은퇴 당하면서 권력에서 제외된 아들 막센티우스. 그는 수도권을 상실해 불평이 많던 로마 시민들과 결탁, 원로원을 부추겨 스스로 황제가 된다. 그리고 은퇴한 아버지를 다시 불러 세베루스 황제에게 대항, 그를 죽인다. 그런 후 이탈리아 반도와 스페인, 아프리카 등지를 다스렸다. 환심을 사고자 로마 광장에 거대한 공공건물 바실리카를 착공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멈췄다. 그런 후 콘스탄티누스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그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전사한다. 아, 그리고 죽은 권력의 작품 바실리카는 후에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로 명명되어 지금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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