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9/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제국심폐소생술; 밀라노 칙령과 천도

<유럽사20>

305년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은퇴하자 사두체제는 흔들리고 새로운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스스로 황제가 된 막센티우스. 그는 콘스탄티누스를 향해 ‘자기 장인이자 나의 아버지를 죽인 자’라며 선전포고를 해 왔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 한가지 정략결혼을 성사시킨다. 자기 이복동생을 리키니우스에게 줌으로써 그를 자기편으로 묶어두려 했던 것. 그런 후 알프스를 넘어 막센티우스 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로마로 향했다.

그당시 막센티우스는 총병력은 17만명에 기병 1만8천명. 이에 비해 콘스탄티누스는 보병 9만에 기병8천. 야만족을 상대로 변방을 수비한 실전 경험만 가지고는 숫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불안한 마음으로 잠든 밤. 꿈에 저 쪽 하늘에 드러난 라바룸을 보면서 ‘이 표시로 이기리라’ 라는 음성을 들었다. Labarum은 그리스어 ΧΡΙΣΤΟΣ의 첫 두 글자(X카이, P로)를 겹쳐 놓은 것으로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콘스탄티누스. 이튿날 병사들의 방패에 이 글자를 새기라고 명령한 후 그날로 진격한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막센티우스의 중무장한 기병대를 날렵하게 선제 공격했다. 로마의 목욕탕에서 한가하게 향략을 즐기던 병사들이 야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의 선제공격을 받자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졌다. 일단 후퇴해야 하는데 퇴로는 좁은 밀비우스 다리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테베레 강 다리 위에서 자기들끼리 밀치다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기 일쑤. 이 때 막센티우스도 다리 위에서 밀려나 물 속으로 빠졌다. 그는 육중한 갑옷의 무게 때문에 헤엄쳐 나올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물 속을 샅샅히 뒤져 막센티우스의 사체를 찾아내 목을 베어 로마 광장에 내걸었다. 이로써 장인에 이어 처남까지도 죽였다. 물론 둘 다 전쟁 중 적의 수장이었긴 하지만.

그 후 10년 간은 공적으로는 동맹관계, 사적으로는 매제인 리키니우스와의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다. 한 때 평화조약도 맺지만 막판에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준수하게 자란 맏아들 크리스푸스가 이끄는 해군의 도움으로 승리한다. 리키니우스를 테살로니카로 유배 보내고 324년 드디어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그런데 이듬해 리키니우스도 처형한다. 고트족과 내통했다는 핑계로.

그리고 326년에는 막판 승부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큰아들 마저도 잔혹한 고문 끝에 죽인다. 이유는 자신의 후처와 간통했다는 폐륜 혐의. 후처 물론 뜨거운 목욕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둘의 관계?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둘 다 자신의 결백을 죽음으로 증명했다는 사실 뿐. 이러한 잔혹한 가족사를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에게 대제(Magnus, the Great)라는 칭호를 달아주며 참으로 후한 점수를 매긴다. 역사는 사적인 업보 보다 공적인 업적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평가하기 때문이겠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 중 두드러지게 빛나는 것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서 중세를 있게 한 것과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김으로써 로마의 명맥을 천년 더 연장시킨 일. 그냥 놔두면 오늘 내일 할 제국을 일단은 심폐소생술로 살려낸 셈.

312년 10월 29일 로마로 개선한 그가 첫 번 째로 한 일은 313년 2월 3일, 동로마의 리키니우스를 밀라노로 불러 칙령에 공동 서명한 것.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다. 박해할 때 몰수했던 재산은 돌려준다’가 주된 내용. 이 외에도 교회를 세우고 싶으면 부지는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해 주고 성직자는 세금낼 필요 없고…. 황제 개인의 재산도 기부하는 등 신앙의 자유에 덤으로 따라온 혜택들이 많았다. 신자들은 드디어 음습한 카타콤 생활을 청산하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와 찬란한 햇빛을 즐길 수 있게 된 것.

당당하게 밖으로 나온 것은 신자들 뿐만이 아니다. 박해받는 동안 곪을대로 곪은 기독교의 문제점들. 밖으로 나오자 제대로 터진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신풀리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와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삼위일체설을 고수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대결. 그냥 두었다간 둘로 갈라 질 판. 323년 단독 황제가 되면서 꿈꾸던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신>에도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두 파의 대표들을 니케아로 불러 공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황제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손을 들어주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규정했다.

단독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보다는 비잔티움을 더 좋아했다. 우선 원로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전략적으로도 나날이 강해지는 게르만족을 견제하기에도 비잔티움이 더 유리하기 때문. 그래서 천도를 결심, 도시 이름부터 고친다.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그리고 궁전과 교회, 원형경기장 등을 지었다. 그리고 그간 약탈해 쟁여놓은 조각품, 기념물 등 예술품을 옮겨다 세련되고 고급스런 신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330년 5월 11일 자신의 즉위25주년 기념식에서 제국의 수도임을 밝혔다. 신도시에서 황제는 제국의 중흥을 꿈꿨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337년에 사망한다.

그로부터 아주 먼 훗날 파스칼은 “만약에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을 믿고 죽었다면 그는 잃은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있는데 안 믿고 죽는다면 그는 그 길로 지옥행…” 이라 했다. 황제는 이 말을 미리 전해 들은 것일까? 죽기 하루 전에 치른 세례의식으로 평생 지은 모든 죄를 퉁치고 눈을 감는다. 그의 이런 행동 때문에 어떤 이는 그는 기독교를 이용했지 신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가 정답이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그가 기독교 세계화의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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