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9/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제 1차 십자군 전쟁과 예루살렘 왕국 건설

이제까지 살핀 대로 서유럽은 중세에 접어들면서 봉건사회라는 하드웨어가 지닌 봉토 위에 군림하는 영주와 기사, 그리고 그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노 등의 짜임새 속에 그리스도교라는 소프트웨어가 적절하게 운용되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인구도 증가, 이제 유럽이 좁게 느껴져 답답해 질 즈음 그 당시 지중해를 석권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향후 200년 간 지속된 십자가와 초승달의 충돌을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라 한다.
초기의 그 무서운 탄압을 잘 견디고 살아남은 기독교는 중세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체를 품으며 급성장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산 신도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면 무늬만 기독교일 뿐 성경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들을 믿고 있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예수의 피값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거기에 고행이나 미신적인 요소를 잔뜩 보탰다. 성유물의 힘을 믿는다든지, 걸어서 성인의 무덤을 찾아가 참배해야 완전한 죄 사함을 받는 다던지… 그 당시 인기 있던 순례지는 베드로와 바울의 묘가 있는 로마, 지금도 한국사람들이 즐겨 찾는 야고보의 묘가 있다는 산티아고 디 콤포스텔라, 그리고 예루살렘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효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예루살렘 순례길.
그러나 예루살렘은 1071년 이슬람에게 빼앗겨 순례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고 1085년에는 시리아의 안디옥 마저 빼앗기면서 소아시아 전역이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1092년에는 니케아까지 밀고 들어와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해협을 가운데 두고 적과 마주보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1095년에 로마 교황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를 카노사의 굴욕 이래 강화된 교황권을 더욱 견고히 굳힐 기회로 삼았다. 그러려면 전쟁의 성격은 성전(聖戰) 이어야 하고 목적은 예루살렘 탈환이어야 했다. 이 명목이면 모두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 예상은 적중했다.
교황은 즉시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lo vult)고 외치며 거룩한 전쟁의 징표로 겉옷에 십자가를 붙일 것을 명했다. 더 한심한 것은 이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은 덤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선포한 것. 이에 유럽이 좁다고 느낀 제후들, 특히 장자세습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새로운 영지를 꿈꾸며 호응했고, 동방의 진귀한 물품을 동경하던 상인들, 그리고 신분 세탁을 노린 농노들도 모였다. 단지 영토를 지키기 위해 SOS를 쳤을 뿐인데 결과는 엉뚱하게도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종교전쟁으로 둔갑하여 오늘날까지 불편한 관계로 이어진 것.
모두 일곱번의 걸친 원정으로 1차는 1096년 8월 15일 퀄른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난 무리가 있었다. 고된 행군이 비참한 일상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 하층민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이들은 정리할 재산도, 준비할 채비도 없기 때문에 정한 날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은둔자 피에르’와 ‘무일푼 월터’를 따라 아녀자까지 대동하고 행군하는 오합지졸. 이들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약탈과 만행으로 쑥대밭이 되기도. 겨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은 했지만 이들의 행색을 본 시민들은 아연실색. 왕은 급히 배를 마련, 외딴 섬으로 이동시킨 후 제 1차 정규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 합류하라 했으나 듣지 않고 곧장 출발, 매복한 적의 화살에 몰살 당한다. 은둔자 피에르만 겨우 살아남아 1차 정규군에 합류했고.
정식으로 무장하고 정한 날짜에 퀄른을 떠난 정규군은 약 6만에 달했다. 이들은 이듬해 5월, 해협을 건넌지 3주만에 니케아를 도로 찾아 비잔틴 제국에게 돌려 주었다. 7월에 접어들자 찌는 듯한 날씨에 터키군의 화살 세례를 받으며 안디옥에 이르렀다.
안디옥 성벽은 견고했다. 곧바로 뚫지 못하고 성밖에서 지체하는 동안 바다를 통해 적군이 몰려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비잔틴 황제를 포함한 몇몇 십자군 병력은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황제가 돌아간 이상 이 성을 비잔틴 제국에게 돌려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영주들이 모여 결정한 사안이 사기를 돋구웠다. 누구든 먼저 입성하는 자가 이 도성을 차지하기로. 죽기 살기로 싸운 결과 이탈리아 남부에서 배를 타고 온 보헤몬드가 성의 주인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성은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식량도 거덜나고 있었다. 이 때 은둔자 피에르가 또 일을 낸다. 어디서 주은 녹슨 긴 창을 들고 와서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외친다. 이에 힘을 얻은 십자군. 성문을 박차고 나가 용감하게 싸워 이긴다.
녹슨 창 하나에 탄력받은 군사들이 그대로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안디옥 성벽보다 더 높고 더 견고하다. 남은 군사들도 기사 1200명에 보명 1만2천 정도. 지칠대로 지친데다 식량도 거의 떨어져간다. 그래서 7월 8일 금식을 선포한 후 여호수아가 했던 것처럼 성을 돌았다. 그리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 또 은둔자 피에르의 사기 돋구는 연설을 듣는다. 그런 후 고드프리의 공격 명령에 따라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성문을 열 수 있었다. 출정한지 5년만에 얻은 승리였다.
그 동안 성지를 더럽혔다는 생각으로 그 성안의 주민들을 모두 학살했다. 신성모독의 댓가라고 생각하면서 6주 동안 줄기차게 죽였다. 그런 후 대부분은 돌아갔으나 고드프리를 위시한 일부 십자군은 남아 예루살렘 왕국을 세운다. 이 불편한 역사로 이슬람과 기독교는 앙숙으로 남는다,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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