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9/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비잔틴 제국 황제의 힘겨루기

<유럽사23>

앞서 살핀대로 훈족에게 밀려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쑥대밭이 된 유럽에서 프랑크 왕국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프랑크 왕국이 주도권을 잡게 된 계기는 클로비스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 로마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나라가 망한 후 서방세계의 구심점이 되어 행정권까지 행사하고 있었고. 게다가 <피핀의 기증>으로 교황령도 생겼다.
800년에는 교황이 프랑코 국왕인 샤를마뉴에게 서로마제국 왕관을 씌우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라 칭하기까지. 사실 그 명칭은 결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닌,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지만 이 대관식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왜냐하면 이를 계기로 로마 교회는 동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주장하기에 이르니까.
이 둘의 행동을 지켜본 동로마제국은 심기가 불편했다. 아니, 그 전부터 불편함의 연속이긴 했다. 서로마제국이 망하기 전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을 때 5대 교구가 있었다. 로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성경에는 시리아 접경에 있는 안디옥)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다. 그 중 로마 카톨릭(Catholic = 보편적)을 제외한 4교구가 그리스 정교회(Orthodox = 올바른 믿음) 소속이었다. 그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대주교 임명권, 종교회의 소집, 결정권을 가진, 정치와 종교를 총괄하는 절대적인 지배자였고.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636년에 이슬람에게 시리아를 빼앗기고 이어서 642년에는 이집트까지 빼앗기게 된다. 때문에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랙산드리아 교구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고 콘스탄티노플만 남는다. 그래서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를 총대주교로 승격시켜 권위를 세워주었지만 여전히 황제에게 예속된다. 이렇게 다 빼앗기고 달랑 둘만 남았지만 두 주교 간의 서열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고.
726년 비잔틴 제국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파괴령을 내려 둘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이는 두 교회의 분리의 시발점이 된다. 로마 카톨릭은 성상을, 초기에는 무식한 게르만을 상대로 알기 쉽게 전도하기 위한 시청각 교육용으로 사용했다. 문맹에게 성서의 내용을 알 수 있도록 교회를 성화와 성상으로 장식했다. 문맹에게 그림과 조각은 글과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이를 갖고 왈가왈부할 가치도 없는데 파괴라니! 라며 반대했다. 이 반응에 분노한 레오 3세는 로마 교구가 관할하던 남부이탈리아, 시실리아, 일리리쿰 지역을 콘스탄티노플 교구로 이전, 로마 교회에 경제적 타격을 가해 두 교회의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파인다.
그렇다면 레오3세가 성상 파괴령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그림 같이 아름다운 관광명소가 된 산토리니. 그 당시 티라 섬으로 불린 그곳에 화산이 터졌다. 726년에 생긴 일이다. 레오 3세는 이 재해를 신의 분노로 여겼다. 그리고 분노의 이유를 성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상 파괴령을 내린 속내는 따로 있었다. 점점 세력이 커지는 수도원과 수도사들을 손보는 것. 그 당시 성상이나 성화는 수도원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여기다 세금, 징병 면제 혜택까지. 따라서 이들의 경제력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무서울 정도로 커갔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거주하는 수도사나 은둔자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황제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의 영적 능력을 지닌 것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쯤되니, 비잔틴 제국의 젊은이들이 수도원으로 몰렸다. 결과는? 나라의 인적 자원이 고갈되어 농촌은 일손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야 할 병력보충에 어려움을 겪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렇게 비잔틴 제국의 경제 사회 군사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가장 심하게 타격을 입은 때는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 때. 그는 수도사들을 사회의 암적 존재로 간주, 수도 생활 그만 접고 수녀들 중에 부인감을 골라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지, 소경이 되어 유배를 가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기까지.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개혁 운동은 120년간 지속되었다가 843년 공회의에서 성상숭배 금지령이 폐지되면서 교회의 승리로 끝난다. 그 후 성화는 비잔틴 미술의 극치인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찬란한 문화 유산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갈등의 요소는 많다. 우선,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다. 카톨릭은 라틴어를 사용하지만 동방정교회는 고대그리스어(헬라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리스, 또는 희랍 정교회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필리오케 논쟁이다. 이 논쟁은 문구 해석의 차이로 시작하여 교황 수위권 문제로까지 비약하게 된다.
필리오케(Filioque)는 ‘and the Son’이란 뜻의 라틴어.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를 기본으로 한 니케아 신경이 나왔다. 삼위일체설은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이다. 이에 비해 예수를 구원을 위해 피조된 으뜸 피조물 정도로 생각하는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규정되었다. 이들 이단을 더욱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3위1체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헬라어의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and the Son을 넣어 번역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몇 백년을 질질 끌며 갈등하게 된다. 그렇다가 11세기에 이르러 교황 베네딕투스 8세는 이를 이용하여 서방교회의 자립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베드로는 성자에게서도 나오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자. 그는 로마에서 순교해서 로마에 묻혔다. 따라서 베드로를 잇는 로마 교황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로마 교황은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필리오케 한 절을 구실로 로마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는 지경에 이르다가 두 교회는 완전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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