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5/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십자군 전쟁 후유증으로 거둔 의외의 수확들

십자군은 약탈, 방화, 살육을 저지를 때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를 외쳐댔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고 가르치셨다(마태복음26:52). 따라서 20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완전 다른 스토리. 각자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시작한 참혹한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포장시키려 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무모한 소모전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그 때의 뼈아픈 기억으로 지금까지도 앙숙으로 남게 되었고. 하지만 유럽은 그런 후유증 속에서도 의외로 풍성한 수확을 거둠으로써 서서히 중세의 문을 닫고 근세의 문을 연 계기가 되었다.
지중해가 문명의 교류장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 다시 살아났다. 먼 옛날, 처음 지중해로 진출한 민족은 페니키아인이었다. 그 뒤를 이어 그리스가 나폴리, 마르세유 등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그 후로는 로마제국이 품었고. 로마가 망한 후에는 게르만족의 중심이 된 프랑스, 그리스를 중심으로 비잔틴,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이슬람권이 차지하여 별다른 교류없이 묵묵히 흐르기만.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다시 동방의 문명과 서방의 문화가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거쳐서 활발히 교류되기 시작하였다.
제 1차 원정 때 예루살렘 성을 차지한 십자군은 성안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운 후 자신들이 쓸 물자를 유럽에서 공급해 왔다. 이 때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무역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상권에 도전한 결과가 되었다. 상권을 빼앗긴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고리대금, 전당포, 환전상 등 남들이 기피하는 직종에 종사하게 된다. 단지 살아 남기 위해서.
이렇게 뚫린 해상 루트는 상인뿐만이 아니라 성지 순례자도 이용하게 되면서 돈이 되는 황금길이 되고. 이들 도시국가들은 예루살렘 왕국 전성기에는 물론 팔레스타인 지역이 다시 이슬람권에 넘어간 후에도 개의치 않고 활발한 해상 운송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3차원정부터 독일을 제외한 영국과 프랑스 십자군은 배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4차 때에는 베니스 상인들이 제공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비잔틴제국을 점령하고 라틴제국을 건설한 십자군. 베네치아는 해상 도시 국가답게 내륙지방은 프랑스에게 넘기고 베네치아는 해안 지역을 차지한 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블)을 중심으로 아드리아해, 지중해, 에게해를 품은 후 흑해까지 진출하여 본격적인 무역 루트를 개척, 동서 무역의 허브가 된다. 이로써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되고 이를 계기로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앞으로 르네상스를 낳을 산실 역할을 떠 맡게 된다.
후추를 포함한 향신료, 면직물, 비단, 귀금속 등 다양한 종류의 소비 상품 이외에도 의학, 화학, 천문학 등의 전문 지식이나 제지술, 알코올이나 설탕 제조법 등 선진 기술이 이 해상 루트를 통하여 동양에서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 당시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문화가 유럽보다 훨씬 앞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비잔틴 제국은 로마에서 분리되었으니까 기존의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겠지만 아라비아 사막에 둥지를 튼 이슬람은 어떻게 그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자기 소유라고는 오직 초승달뿐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주변에 널린 모든 문명을 끌어 모았단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비잔틴 문명, 인도, 페르시아 문명까지. 이 모두를 섞어 자기 것으로 소화시켰을 때 위대한 사상, 고도의 학문, 찬란한 문명이 빚어 진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유럽에게 준 선물은 첫 째 수학이다. 최초로 0을 사용함으로써 컴퓨터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알고리즘을 선사한 것. 두 번째는 천문학으로 어디서든 메카로 향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일정한 예배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 발달한 분야라고. 이 외에도 의학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학문이 유럽으로 전수되었고 이러한 새 학문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곳, 대학이 시작된 것이 중세의 커다란 특징이 된다. 그 당시 대학은 장소 개념보다는 이러한 학문을 먼저 흡수해 발전시킨 교수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교수가 곧 학교이기 때문에 교수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 학생들도 그를 따라 옮겨 다녔다. 점점 건물이 지어지면서 교수도 한 곳에 머물게 되었지만.
유럽인들도 아랍 서적을 부지런히 탐독했고 선진 문명을 재빠르게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십자군 원정 때만해도 비싼 값을 지불하고 들여온 견직물을 12세기 후반부터는 이탈리아 도시들이 생산하기 시작, 명품의 본거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수입해 쓰던 종이를 13세기 후반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생산하기 시작, 중세 말기에는 파브리아노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 져 전 유럽으로 공급되었고 동방으로 역수출하기도.
베네치아나 피렌체로 들어온 선진 문물을 내륙으로 운반하는 유통업이 성행되자 직종별 길드가 형성되고 화폐 경제가 발달되었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은 전적으로 토지에만 의존하던 봉건사회를 서서히 스러지게 만들었다. 그렇잖아도 많은 영주와 기사들이 전사했고 물적 손실도 엄청나 봉건체제가 흔들리던 판인데……. 영주를 잃은 봉토는 왕이 몰수하는 대신 그 기사들을 데리고 왕 자신이 출정하게 되어 그 동안 왕권은 점점 강화되었고 이런 현상은 중앙집권으로 이어져 가까운 미래에 근대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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