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2/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괜찮으세요? 의원님이 잘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차 대기했습니다”
여경이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다소 어기적거리며 혼자서 병원 문을 나왔을 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남자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하며 아주 정중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돌아보니 그녀의 숨겨진 남자인 ‘의원님’의 기사 겸 측근 비서였다. 여경은 암말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또박 물었다.
“의원님은요? “마침… 중요회의에 참석중이셔서…”
남자가 마치 자기가 죄지은 듯 미안한 표정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그러는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취가 풀리는지 하체가 얼얼해지며 간헐적으로 통증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시험하듯 그에게 다시 물었다.
“오신대요? 언제?”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여경은 그러한 말이라도 내뱉지 않고는 그냥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남자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딱한 표정을 지었다.
“잘 모셔다 드리라 했습니다. 바로 연락하신다고요…”
여경은 잠시 하늘을 보았다. 언젠가 그녀는 진한 섹스가 끝난 후 그 남자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저…진짜 사랑하는 건가요?” / “그러엄!”
“얼만큼요?” / “아주 많이…이만큼”
남자는 과장되게 말하며 팔을 크게 벌렸었다. 그때 그녀는 공허하게 웃었다. 사랑이란 것이 과연 팔로 원을 그리며 ‘이만큼’ 하고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뚜렷하게 형상으로 그려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정말로 사랑이란 것이 눈에 보이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부피와 무게를 달아볼 수 있고, 그 모습을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노래처럼 말로만 읊조린다고 그것이 사랑의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 사랑이란 아무 형체가 없어도 깨지고 부서졌을 땐 그 어떤 유형의 물체보다도 그 상처가 아프고 큰 것인 것을… 차라리 사랑이란 것이 양복집에서 맞춤옷을 해 입듯 자로 재고 가위로 자르고 깁고 마름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란 그야말로 유행가 노래 말처럼 한줄기 바람일 뿐인 것을…
여경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남자의 과장된 표현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아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었다. 그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허황된 그 남자가 갑자기 보기 싫어졌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저으기요… 저 혼자 갈래요. 혼자 있고 싶어요”
여경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힘겹게 삼키며, 돌봐주려 따라온 남자를 향해 조그맣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의원님이…”
남자는 순간 당황한 듯,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남자의 손바닥이 젖어있는 느낌이었다. 여경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뿌리치며 다시 한 번 그에게 못을 박았다.
“그냥… 혼자 가겠다구요. 절 놔두고 선생님은 그냥 내려가세요”
“아니…사모님…” 남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다시 붙잡으려 다가들었다.
“됐어요! 저 그냥 놔두세요”
여경의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옥타브가 높아지자 남자가 순간 멈칫했다.
옆 사람들이 흘끔흘끔 그들의 행색을 살피며 야릇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남자는 주변의 눈길을 의식한 듯 멈칫하던 그 동작으로 가만히 선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그럼…” 마침 택시 탈 차례가 되자 여경은 그에게 흘깃 일별을 던진 후 차문을 열고 뒤 좌석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그리곤 문을 잠가버렸다. 그녀는 등받이에 온몸을 묻으며 비로소 눈물이 쏟아져 얼굴을 푹 수그리고 말았다.
여경은 그렇게 그녀의 한 때 주인이었던 그 남자 ㅡ ‘의원님‘과는 그 날 이후 소식을 끊었다고 했다. 여경의 남자는 그 이후 수 차례나 그녀에게 만날 것을 통보를 해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와의 만남을 자제했다고 말했다.
허나, 남자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잘된 일’ 일지도 몰랐다. 바깥에 알려지기에는 떳떳하지 못한 스캔들로 주변의 지탄을 면할 수 없을 것을 그 자신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그녀 스스로 선을 그어준 것이 고마울지도 몰랐다.
여경은 옛날 그녀와 한 때 사랑에 빠졌다가 임신 중절수술을 했던 정치인과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주었었다. 그리고 왜 그 남자와 어떻게 만나 왜 그리 한 때 불같이 타 올랐는지도 스스럼없이 말해주었다. 여경이 말해준 첫 남자와의 마지막 스토리는 대충 이러했다.
“왜 이런 남자 있잖아요? 경마장엘 가면 기수가 경주용 말머리 양 옆으로 뿔 같은 각을 붙여 말의 눈이 앞만 바라보고 뛰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보통 앞뒤 없이 마구 대시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전차’같다고 했던가요 그런 남자 였어요. 그는…”
황철민, 그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동기로 인해 스스로 ‘이것’이라고 판단하면 전혀 주변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참으로 특이한 전차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는 아무데나 함부로 빠져들지 않는 신중함도 가지고 있었고, 그 신중함이 지나쳐 어찌 보면 정말 놀라고 노해야 할 때는 눈썹 한 올 깜짝하지 않는 차가움도 갖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우스우리만치 혼신을 기울이는가 하면, 실처럼 가녀릴 정도로 정에 약하고, 남들이 시큰둥해하며 웃고 넘기는 신파조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한마디로 그는 다소 복잡한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황철민, 그는 무척 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경우 없이 그를 자극한다거나 말짱한 얼굴로 그를 기만이라도 할라치면 그는 결코 타협 없는 집념으로 상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가 하면, 그것이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엔 평생을 상대에게 베풀고 관용할 줄도 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또 역사와 예술, 문화에 대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소양과 조예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사이비라고 평했지만, 여경이 보고 듣기엔 알만큼 알고 똑바른 시각으로 사물에 대한 비평도 곁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냥 사이비로 폄하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는 제법 괜찮은 ‘잡놈’의 속성을 가졌다고 할까…. 다만 버릇처럼 자기의 그 ‘잡성’을 멋지게 부릴 수 있는 기수가 누구인가가 문제라고 늘 혼자 씨부리곤 했었다. 건방지게시리. (계속)



손용상
▶ 소설가 / 경남 밀양 출생. / 경동고,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98년 도미.
▶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1973), 한국문화예술신인상, 에세이문학신인상, 한국평론가협회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시부문), 해외한국소설문학상 등 수상.
▶‘그대속의 타인’‘따라지의 꿈’ ‘코메리칸의 뒤안길’ ‘토무(土舞) 등 장·단편 소설집과 에세이 칼럼집(우리가 사는 이유) 및 운문집(天痴,시간을 잃은) 등 20여권 출간.
▶ 현 미국 텍사스 달라스 거주
글로벌 한미 종합문예지‘한솔문학’대표
▶ 이메일: ysson06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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