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4/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계몽주의: 신성 아닌 이성, 종교 아닌 과학의 힘으로

계몽주의: 신성 아닌 이성, 종교 아닌 과학의 힘으로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라 했던가, 뭐든지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이 말씀. 지금까지 유럽의 역사를 대충 헤아려 보았는데 오늘은2천5백년 전에 공자님이 하신 이 말씀이 유독 땡긴다. 왜일까? 중세시대에는 인간의 본성을 지나치게 억압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 후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휴우~, 이젠 숨이라도 제대로 고르며 살 수 있게 되나 보다 싶더니 곧이어 열린 계몽주의 시대. 이제는 정반대로 지나치게 이성, 철학, 과학에만 몰두하더니 마침내 인본주의로 내달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성서에 드러난 창조주는 태초에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존재로 채우셨다. 혼돈을 질서로; 자연 속에 질서를 Operating System으로 이미 입력해 넣으셨다는 뜻이다. 공허를 존재로;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조성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이란 존재를 만들어 이 모든 것을 경영하게 하셨다. 물론 그 일을 감당할만한 이성을 심어주시면서.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천년 동안 인위적 권위, 교황 밑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억눌려 살다가 계몽시대가 열리면서 창조 때부터 이미 주어진 이성의 힘으로, 창조 때부터 이미 입력된 OS를 깨우치고는 이번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린다. ‘이제부터는 신이나 교황의 보살핌 따위는 필요 없어, 이성으로 우주의 모든 질서를 관찰할 수 있으니까, 성경? 이성적으로 비판 좀 해 본 후에….’ 식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그렇게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신학자들도 계몽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종교를 깡그리 버리는 대신 기독교의 미신적인 요소만 도려내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이신론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그 당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지도자들이 대개 이러한 종교관을 갖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종교계가 이러하니 철학과 과학은 이제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어 드디어 근대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

우선 근대 철학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이 사물을 경험하고 관찰한 뒤 진리나 법칙을 찾아내는 귀납법적 철학에서 발달되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 경험을 통해 물은 차고 불은 뜨겁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굳이 손을 대보지 않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이들 경험주의자에게서 나온 말.

이에 반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경험보다 더 중시하는 연역법적 철학 이론이 프랑스의 데카르트에 의해 발달되었다. 합리적인 사고. 간단히 말하면 생각이다. 인간이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에서 존재 목적을 찾았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은 합리주의 학파에게서 나온 말.

그 동안 과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오랜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이 진리로 통했다. 그렇던 것이 16세기에 들어서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태양 중심설을 주장했다. 이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자신이 직접 망원경을 만들어 목성 주위에 위성이 돌고 있음을 발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과학적 이론의 부족으로 재판에서 패소, 참담한 심정으로 재판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신음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러한 중얼거림이 있은 후, 근대 유럽의 과학사에 위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이다. 당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인 아이작 뉴턴은 모든 물체 사이에 서로 끌어 당기는 힘인 중력과 관성의 법칙을 알아내고는 구태여 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만물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근대 과학이 시작되고.

그렇다면 문화 예술 분야는 어떠했는가? 17세기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궁궐에 살롱을 차렸다. 한국에서는 살롱에 ‘룸’자를 덧붙여 왠지 퇴폐적인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저질스러운 곳이 되었지만 원조 살롱은 프랑스의 귀족 여성들과 남성들이 모여 우아한 대화를 나누면서 품위있는 예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그 후로는 주로 귀부인들이 자신의 집에 살롱을 열었고 여기에 문인과 철학자들이 모여 문화를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17세기 이후 공식적인 유럽의 학문과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 설립된 왕립 아카데미에서 발달되었고, 사적으로는 살롱에서 지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살롱들은 주인인 귀부인의 재능과 취향에 따라 제각기 성격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랑부이예 부인의 살롱은 주로 문인들이 모였다. 단골 문인들은 자기들끼리 고어체로 편지를 교환하기도 하고 옛 시의 형태를 따서 작품을 겨루기도 하면서 풍류를 즐겼다고. 후에는 자작시가 유명해 지려면 그 살롱에서 시 낭송회를 열었느냐 여부에 달렸을 정도로 권위있는 모임이 되었기 때문에 고전문학은 이 살롱에서 부활했다고 말해지기도.

물론 짝퉁 재원들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롱을 여는 귀부인들은 차츰 전문 지식을 습득하였다. 예를 들어 볼테르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샤틀레 부인의 경우, 물리학을 집필할 만큼 전문지식을 쌓은 인물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출판하기도. 또한 텡상 부인은 몽테스티외의 <법의 정신>을 자신의 살롱에서 팔았고, 조프랑 부인의 살롱에서는 디드로의 <백과전서>를 지원했다. 데팡 부인의 살롱에는 <법의정신>을 쓴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이 모여 문학 이외에도 정치 경제를 토론, 계몽사상가들의 아지트가 되어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는 혁명의 산실 역할을 담당하기도. 참고로, 어린 모짜르트의 데뷰 무대도 콩티 공작의 살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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