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5/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후회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 5화


평양 출생과 어린 시절

<지난주에 이어서>

비행기 한 대를 통째 기부한 여자,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일본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동창생과 단동시에서 마주쳤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당시 단동시의 시장을 맡고 있던 일본 고위 간부의 아내였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늘 사상적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그 동창이 주관하는 행사들에 참여해야 했다. 한번은 일본 공군을 위한 모금운동의 일환으로 주민들에게서 철제 물건들을 기부받는 행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아버지에 대한 일본정부의 의심을 한방에 날려버리기로 결심하셨다. 어머니는 시장 부인인 동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잔잔한 철제 물건 모아 뭐하겠니? 내가 그냥 비행기를 한 대 사줄게!”
어머니는 당시 세계적인 무용수로 이름을 떨치던 최승희씨를 단동으로 초청하여 단동 극장에서 공연하도록 했다. 칼춤, 부채춤, 승무에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추는 현대무용까지, 최승희의 춤을 본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넋이 나가버렸다. 그녀의 무용 공연은 날마다 대성황을 이루었고, 일주일 공연이 끝나자 정말로 비행기 한 대를 살 만한 자금이 모였다. 어머니는 그 수익금을 통째로 일본 공군에 기부했다.
최승희 공연으로 거금을 기부한 후부터 아버지를 뒤쫓아 다니던 일본첩보원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어머니 덕분에 최승희를 사석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우리 어머니도 결혼하지 않고 무용을 했더라면 그녀처럼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최승희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은 어머니와 매우 비슷했다. 어머니는 평소 러시아 의상실에 가서 최신 유럽 패션의 옷을 해 입었다. 그 당시 스탈린을 선두로 공산당이 러시아를 장악하게 되자 많은 백인 러시아인들이 중국의 남쪽인 단동으로 도망을 왔다. 그래서 그들이 차린 식당과 가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외국의 풍습과 문화에 관심이 많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셨던 어머니에게는 러시아 상류층의 문화를 맛보는 것이 하나의 낙이자 갑갑한 현실의 탈출구였던 것이다.
나중에 내가 소학교에 다니던 때의 일화가 기억난다. 어느 날인가 내가 점심도시락을 집에 두고 온 날이었다. 나는 그냥 내 짝의 도시락을 같이 나눠 먹을 생각이었는데, 점심 시간이 되자마자 교실 뒷문이 열리며 어머니께서 교실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깃털 달린 모자와 유럽풍 정장에 무릎까지 오는 가죽부츠 차림이었다. 반 아이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무슨 영화배우가 걸어오는 줄 알았나 보다. 어머니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면서 나에게로 다가와 당당하게 내 책상 위에 도시락 가방을 내려 놓으셨다.
“햄 계란 샌드위치다. 맛있게 먹어.”
어머니가 나가신 후에도 나는 그 도시락을 풀어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샌드위치가 뭔지도 몰랐고, 대부분 햄이라는 걸 구경조차 못했다. 꽁보리밥과 삶은 감자를 도시락으로 먹는 아이들 속에서 도저히 샌드위치를 꺼내 먹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앉아 공부만 했다. 결국 나중에 손도 안 댄 샌드위치를 집으로 가져갔다. 어머니는 도시락 가방을 열어보고 노발대발하셨다.
“이 못난 놈! 샌드위치가 뭐 별거라고!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먹지 못해? 남들과 다른 게 뭐 어때서!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
그날 엄청나게 심하게 매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도시락을 부끄러이 여긴 죄였다.
굳이 샌드위치가 아니라도 나의 도시락은 다른 친구의 도시락보다 화려했다. 내 도시락에는 소고기 장조림과 계란 같은 것이 들어가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대체로 보리밥과 짠지가 들어간 도시락을 가져왔다. 특히 우리 반 반장이면서 나와 친했던 김명선은 집이 너무 가난했지만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나는 주로 그 친구와 도시락을 바꿔먹었다. 내가 일본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 친구는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명선을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어머니는 사회운동가(social activist) 다운 데가 있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만 직성이 풀렸다.

신사참배와 사쿠라 정신

중국에 머문 지 2년째 되던 해, 아버지는 단동시의 한국인 협회로부터 초빙을 받아 신흥한인 중학교의 교장이 되셨다. 당시 신흥중학교에는 오백 여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북한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해 나는 일곱 살이 되었으므로 대중 소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섞여 있었다. 단동은 원래 중국 영토였으나 1876년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로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에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이 섞여 살고 있었고, 나는 1학년 때까지 일본어와 중국어를 함께 배웠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갈 무렵부터는 일제의 간섭이 더 심해져서 학교에서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다. 또한 교장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이 매일 아침 등교하기 전에 먼저 신당에 가서 신사참배부터 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신사 참배 확인 도장을 받지 못하면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기에 전교생은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신당은 산 꼭대기에 지어져 있었고, 올라가는 길에는 매우 아름답게 손질된 돌계단들이 놓여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200개가 넘어서, 그 계단을 밟고 신당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학교로 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산을 오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벽마다 올라가던 그 돌계단은 자주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골고다의 언덕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따뜻한 옷도 없던 때라 꽁꽁 싸매고 여며도 소용이 없었다. 세찬 칼바람 속에 귀와 볼이 새빨갛게 얼어 버렸고,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예외 없이 무조건 매일 올라가야 했다. 겨울에 독감으로 죽음을 맞는 아이들도 꽤 있었으니, 내가 그 시절을 살아남은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극기 훈련이 저절로 된 부분도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매일 똑 같은 체력단련을 하는 셈이었으니까.
<다음주에 계속>


명인선 박사
(1932~2020)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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