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5/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데카브리스트에 의해 지펴 진 러시아 혁명의 불씨

데카브리스트에 의해 지펴 진 러시아 혁명의 불씨


1825년 겨울, 10대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황태자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사망한다. 그래서 서열로 따지자면 황제의 동생 콘스탄틴이 적격자. 그러나 그는 왕족 출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폴란드 귀족 출신과 재혼했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에 걸려 왕위 계승권을 잃은 상태. morganatic marriage 또는 left-handed marriage라고 부르는 귀천상혼은 신랑신부 중 어느 한쪽의 신분이 기운 결혼을 말한다. 이럴 경우 법적으로 결혼은 인정하지만 실제로 당사자는 정부 취급, 아이는 사생아 취급을 하면서 승계권이나 상속권을 박탈하는 제도이다.

콘스탄틴 대공은 형 알렉산드르 1세 밑에서 군인으로 활약할 때 퇴각하는 나폴레옹을 추격, 파리까지 점령한다. 이 때 그를 따르는 많은 젊은 장교들은 발전한 파리의 사회상에 놀라면서 그곳에 흥건히 베어 있는 자유주의 사상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조국 러시아와 비교하게 된다. 모든 권한을 한 손에 거머진 짜르의 전횡과 농노제에 묶여 신음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의 참상을 떠올리며 개혁의 의지를 굳힌다. 그 후 러시아 황실 근위대를 중심으로 구제동맹이라는 결사대를 조직, 공화정, 입헌군주제, 농노제 폐지 등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이제 황제 자리는 콘스탄틴보다 17세나 어린 동생 니콜라이 1세에게 돌아가 버린 것. 그래서 황제 즉위식 날 콘스탄틴을 옹립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원로원 광장에 집결했다. 이를 <데카브리스트(12월)의 난>이라 한다. 하지만 이들의 반란은 간단히 진압되고 젊은 장교들은 사살되거나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즉위식 날부터 피를 본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체제를 지속해 나갈 것을 결심하며 검열제를 실시, 황제 중심의 독재 정치는 그가 퇴임할 때까지 30년 간 지속된다.

시베리아에 도착한 120여명의 젊은 장교들은 발에 족쇄를 차고 광석을 캐는 광부로 전락했지만 이들의 지성까지 족쇄를 채울 수는 없는 일.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이 정착한 이루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고 이에 따른 문화와 예술이 발달된다. 이들 데카브리스트 중 기혼자는 모두 18명. 그 중 11명의 아내들은 신분, 재산, 자식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죄수 광부로 전락한 남편 곁을 찾아 와 분위기 쇄신에 큰 몫을 보탠다.

그들 중 한 부인은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 프시킨을 만난다. 데카브리스트와 사상적으로 통하는, 그가 <자유>라는 반항시로 추방당하지 않았더라면 그 혁명에 가담했을 프시킨(1799-1837)은 그들에게 헌정하는 시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를 써서 그 부인에게 건넨다.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도 / 명예로운 인내심 높이 지켜라 / 그대들의 고통 어린 노동과 / 마음의 분투는 헛되지 않으리니 / 불운의 충직한 자매 / 희망은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 있으니 / 그녀는 깨어날 것이고 그대는 기뻐서 뛰겠지 / 기다리던 그날은 오리라 / 사랑과 우정이 어두운 속박의 문을 넘어 / 그대들에게 넘칠 것이오 / 내 자유의 목소리가 지금 그대들의 감방 / 그 굴까지 다다르듯이 / 무거운 족쇄가 바닥에 떨어지고 / 감옥은 무너지리니 / 자유가 문에서 그대를 맞을 때 / 형제들이 그대에게 검을 내어 주리라 /

동시대를 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역시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왕정을 비판하는 반체제 문학 모임에서 활동하다 걸려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형이 집행되는 순간 극적으로 구출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형 대신 강제노동 4년, 군 복무 4년으로 감형되어 옴스크로 이송되던 중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을 만난다. 그 때 그들에게서 책갈피 속에 지폐가 숨겨진 복음서를 받았다는 일화도 있고. 4년의 강제 노동을 마친 후 군 복무를 하면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썼는데 이 책을 보면 그 당시 데카브리스트의 생활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 중의 하나.

톨스토이(1828-1910)는 <데카브리스트>라는 소설을 썼다. 애초에 기획은 장편이었으나 3부까지만 출판되고 나머지는 미완성인 채 톨스토이 전집에 삽입되었다 한다. 러시아를 개혁해 보려는 데카브리스트들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이들의 고통 어린 노동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고이 간직한 그 꿈은 동시대를 산 대 문호들의 붓 속에서 혁명의 불씨가 되었고 이들이 뿌린 혁명의 씨앗은 한세기 쯤 지나서야 그 싹을 틔우게 된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폴란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니콜라이 1세는 이를 간단히 진압한 후 그나마 조금 주어진 자유와 자치권마저도 박탈, 이전 보다 더 혹독한 식민정책을 폈다.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일자 프랑스와는 아예 외교를 단절하기까지. 그리고 이듬해 항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자 니콜라이 1세는 합스부르크 편에 서서 이를 진압하는 등 <유럽의 헌병> 역할을 톡톡이 해 낸다.

1853년에는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는 동방정교회 교도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오스만 제국과 자주 충돌하다 그 해 7월에는 오스만 제국에 속한 도나우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자 분위기는 험악해 진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 작전을 탐탁치 않게 여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제국은 그 해 10월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한다. 처음에는 근대화된 무기를 소유한 러시아가 승승장구했으나 해를 넘기면서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 60만의 인명피해를 보며 러시아는 패배했다. 참고로, 나이팅게일이 백의의 천사로 등불을 들고 활동한 곳은 바로 이 크림전쟁의 야전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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