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5/2021

코리아월드

휴스턴 코리아월드 주간신문

후회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 12화


북한의 첫 지도자 김일성

<지난주에 이어서>

김일성 소령은 소련군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우리에게 속삭였다. 그에게서는 경험에서 묻어난 조심성과 위엄이 풍겼다. 그 지극한 공포 속에서도, 나는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였던지 따뜻한 온돌방에 눕자 곧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를 제외한 어른들은 아마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눈을 뜨자 아침이었고, 전날 밤 위협이 되었던 소련군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종조부님과 김일성 소령과 아버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이부자리도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나 혼자 편안히 누워 늦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날 아침 방바닥의 온기와 창으로 비쳐 들던 햇살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간밤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김일성 소령에게 감사를 표명한 후 우리는 모두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가히 지옥에서의 하룻밤이라 할 만한 밤이었다. 그날 밤 우리 일가가 몰살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로마넨코의 오른팔이라 할 종조부님과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될 김일성 소령이 힘을 합쳐도 일개 소련군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가 얼마나 힘이 없는 백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이 김일성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가 수령이 된 후에는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1994년, 나는 미국 석유개발 프로그램 컨설턴트로서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서, 김일성 수령을 한번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랐었다. 우리 가족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주 아주 오래 전, 그가 한 가족의 목숨을 구해준 일을 기억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도착하기 몇 개월 전에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투기 폭격에 희생당한 학생들과 함석헌 선생님

1946년 말, 이북의 중학교 학생들이 연합하여 북한 정부를 상대로 평화시위에 나섰다. 군사 훈련과 세뇌교육이 학교 커리큘럼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학생들은 그 비중을 낮추고 더 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허락해 달라고 외쳤다. 그것은 학생다운 요구를 담은 순수한 목적의 행진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소련 전투기 두 대가 나타나 공습을 퍼붓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한 학생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도, 거기서 정말로 폭격을 퍼부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무고한 어린 학생들을 무참히 살해한 소련군의 납득할 수 없는 횡포에 분노했다.
당시 평북자치위원회의 문교부장이었던 함석헌 선생님은 소련 부사령관을 직접 찾아가 그 잔인 무도한 사건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부사령관의 답변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일본군 잔당인 줄 알고 공습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지 1년도 넘었을 때였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소련군의 공습으로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함석헌 선생님은 다시는 정부가 제안하는 고위관리직을 수락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고한 학생들의 죽음을 오랫동안 애도하며 농사만 짓고 살겠다고 했다. 함석헌 선생님은 내 아버지의 오산학교 동창이었고,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수학했다. 함선생님은 교육학을, 아버지는 농경학을 수료했다. 1945년도에 아버지는 북한 정부의 농업부 장관이었고 함선생님은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었는데, 두 분은 매우 각별한 친구 사이였다.

그 후 북한 당국은 함석헌 선생님을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여 감옥에 보냈다. 학생들을 부추겨 소련 공산당 규탄을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소련군 감옥에 갇힌 것이다.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세력이 아닌 건 확실했지만, 원래 공산당원이 아닌 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함선생님에게 음식을 가져다 드리기 위해 몇 차례 감옥에 면회를 갔다. 그 감옥은 특별히 박스형으로 제작되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옆으로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어머니는 분개하시며 이러다가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겠다고, 어떻게든 선생님의 누명을 풀어드리겠노라고 맹세했다.
우여곡절 끝에 종조부님께서 소련 장교에게 부탁하여 함석헌 선생님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이미 장기 계획이 구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어머니는 그를 직접 해주 시로 모시고 가서 그 지역의 가이드를 통해 남한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때 어머니는 사실상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를 탈출시킬 계획을 완료한 상태였던 것이다. 함선생님은 어머니의 계획대로 무사히 남한으로 탈출하셨다.

내가 나중에 남한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함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인성아, 미국에 가거든 각별히 조심해야 된다. 미국이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고 있는지 몰라도 영적 문화는 확실히 퇴보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영적 문화는 배우지 말거라. 그 속에 깊이 빠져들다간 너마저 영혼을 잃을까 봐 걱정이구나.”

함 선생님의 조언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내 아버지의 동창이었지만, 내 부모님은 함선생님의 지성과 영적 통찰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함 선생님을 소련군 감옥에서 빼내고 남한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과 목숨까지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부모님의 판단은 정확했다. 함 선생님은 이후 한국의 영적 지도자, 민중의 봉사자, 교육가, 사상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의 간디”로 일컬어졌고, 두 번씩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다음주에 계속>


명인선 박사
(1932~2020)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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